내 운세의 흐름? 평생운세, 토정비결, 주역점으로!
- 작성일25-01-17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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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Primo
토정비결 토정비결 판본 (주간경향)아산 현감 이지함이 졸했다. 지함의 자는 형중이다. 기품이 신기하였고 성격이 탁월하여 어느 격식에도 매이지 않았다.모산수 정랑(이정랑 ~1549 명종 4년 역모 관련자로 체포되어 국문을 받다가 죽었다)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초례를 치르고 밖에 나갔다가늦게 들어왔다. 집안 사람들이 나갈 때 입었던 새 도포를 어디에 두었느냐고 물으니 홍제교를 지날 때 얼어죽게 된 거지 아이를 만나 도포를 세 쪽으로 나누어 세 아이에게 입혀주고 왔다고 토정비결 했다. 어려서 글을 배우지 않았지만 형 이지번의 권고를받고 마침내 분발하여 학문에 주력하면서 밤새도록 공부했다. 경전을 통달하고 사서와 제자백가책까지 섭렵했다... 그는 사람을 관찰할 때 현부와 길흉을 이따금 먼저 알아맞추곤 하였는데 사람들은 무슨 수로 그렇게 알아맞추는지 아무도 몰랐다....처신을 확고히 하되 여색을 더욱 조심하였다.젊은 시절 주군을 유람한 적이 있는데 수령과 군수가 이름난 기생을 시켜 시험해 보았지만 끝내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극기로 색욕을 토정비결 끊었다. 충남 보령 토정 이지함 묘소열흘을 굶고도 견딜 수 있었으며 여름철에도 물을 마시지 않았다. 초립(삿갓)을 쓰고 나막신을신은 채 구부정한 모습으로 시장 안을 돌아다니면 사람들이 손가락질 하며 웃었으나 아무렇지않게 여겼다. 천리 먼 길을 걸어 다녔고 배 타고바다에 떠 다니기를 좋아하여 제주도에 자주 들어갔는데, 바람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조수 시기를 알았기 때문에 한 번도 위험한 고비를겪지 않았다. 선친의 산소를 위하여 토정비결 바닷물을 막아 산을 만들려고 수천석 곡식을 모았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다.교우 관계로는 이이와 가장 친했는데 이이가성리학을 공부하라고 하자 토정은 "나는 욕심이 많아서 할 수 없다"고 했다.,그는 항상말하기를 "1백리 되는 고을을 얻어서 정치를 하면 가난한 백성을 부자로 만들고 야박한 풍속을 돈독하게 만들며 어지러운 정치를 다스리게 하여 나라의 보장으로 만들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말년에 아산 군에 부임하여 정치를 하게 되었다. 정치는 백성을 사랑하는 토정비결 것을 주장으로 삼아서 해를 없애고 폐단을 제거하면서한창 시설을 갖추어 나갔는데 갑자기 병으로 졸하니 고을 사람들이 마치 친척이 죽은것 처럼 슬퍼하였다.지함은 일찌기 용산의 마포 항구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든 다음 아래로는 굴을 파고 위에는 정자를 지어 이름을 토정이라 하였다.이후 큰 물이 사납게 할퀴고 지나갔지만 흙언덕은 완연하게 그대로 남아있다."(선조실록 11년 7월 1일)이지함이 지은 정자가 있던 곳은 마포구용강동이다. 마포구 마포동과 합정동 사이에 토정비결 길이 있다. 길 이름이 '토정로'다. 묘소는 충남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에 있다. 가까운 곳에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 묘소도 있다. 그는 이지함의 친형 이지번의 아들이다. 이산해의 사위는 한음 이덕형이다. 이덕형도 영의정을 지냈다. 장인과 사위가 모두 영의정을 지냈다. 이산해가 숙부이지함에게 사윗감을 골라달라고 하자 한음 이덕형을 추천하면서 사위가 먼저 재상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다.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 이산해의 사위 한음 토정비결 이덕형 이산해는 숙부 이지함의 묘갈명에서 "배 타기를 좋아해서 큰 바다를 마치 평지처럼 밟고 다녔고, 나라 안 산천을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했다.토정비결은 예지력과 신통력이 뛰어났던 이지함의 이름을 빌어 후세 사람이 펴낸 책이다. 새해에는 어떤 일이 가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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